[정이도 칼럼] 아이는 어른답게 말고, 어른처럼 대해야
[정이도 칼럼] 아이는 어른답게 말고, 어른처럼 대해야
  • 공학저널
  • 승인 2020.11.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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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한 시간은 어른의 하루보다도 값지다.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에 교육 방법에 따라 2~3개 국어도 쉽게 배운다. 고정관념이 없기에 정보와 지식을 가감 없이 받아들인다.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받아들이는 환경과 방법에 따라 아이에게는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어 고정관념 가득한 어른의 기준을 적용하여 가르치면 안 된다. 이 가르침이 자율성을 해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창의력 발달에는 독이다.

어른의 기준에서 아이는 예의 바르고 도덕적으로 커야 한다. 똑똑해야 하고 동생들을 잘 돌봐줄 수도 있어야 하고 투정 부리지 않고 얌전해야 한다. 그래야 착한 아이가 되고 나중에 크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어른 같은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렇게 자라난 아이는 나중에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창의력 높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어른스러운 아이는 창의력이 높을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아이에게 어른이 알아야 할 것들을 일찍부터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배웠던 유교적 관념, 도덕, 윤리 같은 것들은 사춘기 이후의 청년기(일반적으로 13 ~23세)가 되었을 때 가르쳐도 늦지 않다. 그전에는 어른이 되는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와 청소년의 교육 방법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진행되어야 한다. 아이일 때는 창의성을 강조하고 청소년기 이후에는 사회성을 강조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창의력 발달을 위해서는 왜 이렇게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을까? 나이에 따라 교육 방법이 달라야 하고 제약을 받아서도 안 되고 사회성은 없어야 하고 어른다워서는 안 된다. 하지 말라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도 많은데 어떻게 키우라는 것일까?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힌트다.

우선 인간은 어렵고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 이외의 다른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어울려 살아가고, 가족을 만들고 집단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기에 이들이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며 산다.

그러므로 아이를 아이라는 이유로 어른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아이의 행동을 조종하려 한다. 어른이라는 기준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만약 50살까지 어린이라 규정되어 있으면 5살과 50살 모두 같은 어린이일 뿐이다.

기준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기준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창의력의 발달에 제한을 받지 않게 하려면 아이의 본능에 맞춰 할 수 있게 해줘야 하고 제약을 두면 안 된다. 그런 자유로운 행동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규범이나 도덕적인 문제는 부모나 어른이 감당해야 한다. 한마디로 뒤치다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기적으로 커도 상관없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사회성은 배울 것이고 여러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될 것이다. 구태여 어릴 때부터 창의력의 크기를 깎아가며 어른처럼 키울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을 알려주지 말고 질문을 통해 생각할 시간을 주면 된다. 질문을 해서 정보와 지식에 대한 내용을 끌어내야 한다. 이런 방법이 정착되면 아이는 대화에서 질문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창의력이 발달한다.

질문을 많이 하는 아이는 점점 창의력이 높은 아이가 되어간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아이의 질문에는 무조건 성실하게 답변해 줘야 한다. 귀찮다고 대화를 그만두려 한다면 그날의 창의력은 거기까지만 발달한다. 그래서 인내심이 없는 부모 밑에서는 창의력이 높은 아이로 성장할 수 없다. 그런 부모는 질문을 주고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답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신호등을 알려줄 때, 대부분의 부모는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녹색 불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다. 하지만 아이는 왜 그래야 하는지가 궁금하다. 빨간색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는 빨간불일 때 건너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단순한 정보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야 한다.

차를 피해서 도로를 건너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고 방법을 찾아갈 수 있게 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신호등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그와 관련하여 많은 상상력을 펼친다. 이제 아이는 하늘을 보고 비행기도 신호등이 필요하냔 상상을 하게 되고 빨간색 비행기는 날 수 없느냐 등의 질문을 쏟아 놓는다. 이런 식으로 아이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그것만 해도 된다.

혹시 우리 주변에 아이 같은 어른을 한두 명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뱉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 없이 하고, 천진난만하고 순수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왜 저럴까? 좀 이상해? 라고 생각도 한다. 단지 그 사람은 창의력이 높은 사람이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어른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혼자 꾸역꾸역 창의력 높게 성장한 기특한 사람이다.

반면에 조숙하고 어른스러운 아이도 볼 수 있다. 이 아이는 창의력 발달의 측면에서는 잘못 컸다. 조숙하고 어른스럽다는 것은 주변의 눈치를 잘 살핀다는 것이고 말 그대로 일찍이 사회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아이의 대부분은 가정 내의 불화를 자주 겪었거나 많은 압박을 받으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아이가 좀 더 자유롭게 제약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 기회를 주자. 그렇게 만들어진 높은 창의력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도 그 사회의 규범 안에서 창의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 그들의 창의력에 경험이 많아지면 분명 사회에도 도움을 주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 혜택은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받게 된다. 특히 공학 분야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필요하다.

공학에서는 디자이너가 매개체를 아름답게 디자인하고 엔지니어는 이에 맞춰 구조설계를 한다. 흔히 디자이너가 창의력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더 큰 창의력이 필요한 것은 엔지니어다. 디자이너가 건물을, 다리를, 자동차나 로봇을 미적으로 설계했지만, 엔지니어는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구조적으로 가능한 방향으로 디자인을 변경하게 된다.

디자인이 역사에 남을 명작이더라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무용지물이다. 그 디자인은 엔지니어가 그대로 구조설계를 한 이후에나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구조설계에서는 디자이너가 가지고 있는 이상의 높은 창의력이 요구된다.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기에 공학인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창의란 것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가 아름다움이나 비전을 제시했을 때 그것을 현실에 나타내는 것.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공학인이다. 아름다움이나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높은 창의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나타내는 것은 오직 고차원의 창의력을 가진 엔지니어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릴 때 만들어진다.

 

 

 

 

 

 

글_정이도
(주)드림기획 대표이사
공학전문기자/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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